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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보랏빛

malingering

malingering ;[명사](의학) 꾀병


처음에 교도소 근무를 배치 받았을 때는 거짓으로 증상을 꾸며내는 환자를 어떻게 감별할지가 걱정이었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진료를 보다보니 환자가 호소하는 증상이 가짜인지 진짜인지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환자가 호소하는 증상을 거짓으로 생각하다보면 정작 진짜 증상을 호소하는 위급한 환자를 민감하게 발견하기 어렵다는 것은 둘째로 치더라도 의사가 환자의 증상을 진짜로 믿고 진료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앞으로 얘기하게 될 증상(symptom)은 환자가 호소하는 주관적인 상태를 뜻하고, 징후(sign)는 의사가 환자를 진찰하며 관찰하게 되는 객관적인 환자의 상태를 뜻한다. 박신양이 주연을 맡았던 법의학 드라마 "싸인(sign)"의 내용이 주관적인 증상을 호소할 수 없는 사자(死者)를 부검하는 법의관에 관한 내용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 같다.


간략히 말하면 지금까지의 현대 의학은 일차적으로 환자가 호소하는 증상(symptom)을 "믿고" 객관적인 징후(sign)를 찾아서 추가적인 검사들로 그 사람이 갖고 있을지 모르는 질환을 찾아가는 방향으로 발전해왔기 때문이다. 이 명제의 전제는 의사는 환자의 증상을 믿는다는 것이다. 증상이 진짜인지 아닌지 증명하는 것은 기본적인 진료과정 중에 들어있지도 않고 의학적 도구들도 이런 것을 증명하기 위해 발전해오지도 않았다. 


의사는 환자가 호소하는 증상은 사실이라고 믿고 진료하는 것이다.


의사는 환자의 말을 믿고 진료한다는 것이 어떻게 생각하면 고귀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나. 반대로 생각해보면 환자의 증상을 부정함으로써 이득을 얻을 수 있는 측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환자는 자신의 이득(그것을 스스로 인지하든 못하든)을 위해 증상을 호소하는 것이고. 의사도 환자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굳이 증명해서 진료를 중단해버리는 것이 진료를 지속적으로 이어가는 것보다 좋을 경우가 적으며. 따라서 검사 기계들도 발견하기 힘든 질환을 좀더 쉽게 발견하기 위해 개발되고 있지, 환자에게 아무런 질환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개발되는 검사 기계는 당연히 없다. 간단히 말해서 의학은 환자가 호소하는 증상이 사실인지 아닌지 여부를 증명하는 것에는 그닥 관심이 없다.

 

게다가 객관적인 징후들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 환자에게 어떠한 질병도 없을 것이라고 확진할 수는 없다. 인간은 신이 아니고, 인체의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 환자의 증상을 모두 진짜라고 믿고 진료하는 이유도 내가 모든 재소자를 진심으로 믿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환자의 거짓 증상을 감별하는 것에는 의학이 발달해오지 않았다는 태생적인 한계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교도소는 사회에서 처럼 검사 도구가 많이 구비된 것도 아니어서. 환자의 거짓 증상을 감별하기 위해서는 결국 사회에 나가서 진료를 받아야 하는 경우도 있는데, 몇몇 재소자들은 이렇게 사회 병원에 한번 나갔다 오는 것(바깥 바람 한번 쐬는 것)만이 자신의 유일한 목적일 경우도 있다. 그러니 내가 환자의 증상은 그냥 믿고 진료하는 수밖에...


특히 우리나라의 특수한 상황 때문에 이러한 의학의 약점(?)을 역이용하는 사람들이 특히 많은데 바로 의무적으로 가야하는 군대 때문이고. 여기에 한가지 더 추가하면 교정시설(교도소,구치소)이 있는 거 같다.


우리나라에는 군대 자체를 빠지고자 하는 목적 내지는 군대 내 훈련을 빠지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증상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있고, 교도소는 사회병원을 나갔다 오거나 재판에서 유리한 결과를 얻기 위해서 증상을 꾸미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우리나라 대개의 남자 의사들은 군의관 등의 과정을 통해 환자의 증상을 색안경을 끼고 보게 되는 훈련 아닌 훈련을 안타깝게도 하게 되는 것 같다.


그러한 훈련을 아무리 하더라도 결국 의사들은 환자가 작정하고 증상을 꾸며대면 정확히 감별하기 힘든데, 그 이유는 위에 적은 의학의 한계 때문이기도 하고, 특정 신체 활동(훈련)을 하기 어려운 정도의 질병의 중증도는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절대적인 기준을 잡을 수 없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애매한 경계에 속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특히 이러한 것들은 근골격계 질환에서 두드러지는데.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평소에 디스크가 있었다며 허리 통증을 호소한다고 해보자. MRI를 찍어서 디스크 소견이 명확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환자의 종합적인 증상과 신체 진찰 결과가 디스크 소견에 합당하다면 디스크에 적용되는 보존적 치료(소염진통제, 물리치료 등)를 시작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왜냐하면 MRI 상태와 실제 디스크 통증과의 연관성이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환자가 증상을 거짓으로 꾸며내지 않더라도 사람에 따라 MRI 소견은 심각한데 증상은 경할 수도 있고, MRI 소견은 경미한데 증상은 심할 수도 있다. 디스크 증상이 없는 일반인을 데려다 허리 MRI를 찍어보면 60-70%정도 요추간판탈출증(허리 디스크)이 관찰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고 들었다. 결국 환자가 아프다면 아픈 거다. 객관적인 검사 결과가 심각하지 않더라도 환자가 보존적 치료에 지속적으로 효과가 없다면 수술의 적응증이 되는 것도 다 이러한 이유에서다.


교통사고 가라 환자가 판을 치고, 병역 비리에서 유난히 근골격계 질환으로 군대를 빠지려는 사람이 많은 것도 이러한 점을 이용하려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