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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아래

환자가 원하는 것

예전에 아버지 간병할 때는 의사가 회진시간에 스치듯 얼굴만 비치고 가버리는 것이 못내 서운했었다. 아버지 상태가 너무 안 좋으니깐. 얼마 못살 거 같으니깐. 이미 포기해버려서 저렇게 빨리 나가버리나.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나. 

병원에서 실습을 돌면서. 환자나 보호자가 실상을 잘 몰라서 그런 거란 생각이 들었다.

회진 돌기 전 주치의와 담당 간호사에게 한 시간 넘게 보고받으며. 차트를 살펴보시는 교수님을 보며.

여러 회의를 통해 타과 교수님과 환자에 대한 의견을 나누는 교수님을 보며.

실제로 환자가 의사를 만나는 시간은 짧아도. 의사는 그 환자에 대해서 훨씬 많은 시간을 고민하고 있다. 

이렇게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 전 우연히 보게 된 한 영상에서.

오늘날 회진은 컴퓨터 앞에서 주로 이루어지고 있지만.

그래도 환자가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라는 얘기를 듣고. 뒤통수를 맞는 기분이었다.


며칠 전 여자친구에게 그 얘기를 하면서.

"의사가 아무리 차트를 오래 보고 환자에 대해서 고민한다 해도. 환자가 정작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래."라고 얘기하자.

여자친구는 "당연히 그런 게 아니지."라며 그걸 이제 알았냐는 듯 어이없단 표정을 지었다. 


실습을 돌면서. 갈수록. 

학생 주제에 차트에 적혀있는 것 외에 내가 추가로 알아낼 수 있는 중요한 소견은 없단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환자나 보호자를 대하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걸 느끼면서. 

언젠가부터 환자를 찾아가서는 차트에 적힌 항목만 후딱 확인만 하는 수준에 머물게 되었다. 

환자랑 얘기하는 시간에 집에 가서 책이라도 한 자 더 보는 게 훨씬 도움될 거라는 생각을 했다. 


혈액종양내과 실습을 돌면서. 이번엔 차트에 적힌 것과는 상관없이 환자에게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신체진찰을 시행했다. 환자의 상태를 물어보고. 좀 더 오랜 얘기를 나누었다.

물론 환자를 오래 만났다는 심적 만족은 있었지만. 

그렇다고 크게 뭘 더 알아낸 것도 아니었다. 아쉽지만 그래서 이번 케이스 발표도 예전 내 발표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