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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보랏빛

행복한 죽음을 맞을 수 있게 도와주는 의사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

수업 중 퀴블러로스 박사의 ‘죽음의 5단계’에 대해 듣는 순간, 이제 잊은 줄로만 알았던 기억이 다시 한 번 아련하게 떠올랐다.

20살, 나는 대학을 재수 중이었다. 예전부터 아프시다 던 아버지는 최근 입원했지만, 곧 퇴원하셨다. 어머니가 몸에 좋다는 온갖 것을 구해 오셔서 아버지께 드리고, 워낙 극진히 간호하시는 대다, 아버지 스스로도 치료에 열심이시니. 나는 곧 나으시겠거니 생각했다.

평소 아버지는 내가 자신과 닮았다며 특히나 예뻐하셨고, 나도 평소 아버지와 친구처럼 친하게 지냈다. 하지만 아버지는 퇴원하시고 난 다음부터 사소한 일로 화내시는 일이 잦아졌고,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이해하지 못했던 나는 아버지를 점점 피해 어느새 서먹한 사이가 되었다. 하긴 얼마 전부턴 아버지가 하루 종일 주무시는 때가 잦아져 사실상 얘기를 나누기도 어려웠다.

그날도 평소처럼 재수학원을 마치고 집에 와 지친 몸을 이끌고 화장실로 들어갔는데 아버지가 거기서 변기 비대 버튼을 만지시며. 어눌한 말투로 “손을.. 씻으려는데.. 왜.. 물이.. 자꾸.. 위로.. 올라오지..?”하고 정말 궁금하다는 듯 물어보시며 솟아오르는 비대 물을 힘겹게 손으로 막고 계셨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에 충격과 무서움을 느껴 베란다에서 빨래를 너시던 어머니를 다급하게 불렀고 구급차로 바로 응급실에 갔다. 부모님은 그때까지도 나와 형에게 아버지의 병명을 숨기셨고, 그날 응급실에 가서야 아버지가 간성혼수라는 증상을 겪었고 간경화를 지나 간암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입원을 받아주는 병원이 없어 이곳저곳 돌아다니다 어렵게 병실을 구한 우리는 그날부터 떠나보낼 준비를 하라는 의사의 말을 매일 들어야만 했다. 배가 산더미처럼 부어오르신 아버지는 모르핀을 맞아도 밤마다 아프다고 애원하셨고, 나는 새벽부터 아침이 밝을 때까지 몇 번씩 호출을 하며, 조금이라도 늦게 오는 의사에게 화를 내곤 했다. 매일 눈물로 기도하고 간혹 아버지의 병세가 조금 좋아지는 듯 보이기도 했기에 나으실 거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점점 더 상태가 나빠지셨는데. 결국, 눈도 뜨지 못하고 말도 못하는 상태로 산소마스크를 끼고 누워계시게 됐지만, 우리 가족은 아버지를 떠나보낼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 같다. 어느 날 교회에서 전도사님이 오셔서 이제 아버지를 떠나보내야 하지 않겠냐고 물었고, 며칠을 고민하다 저녁 때 아버지를 꼭 껴안으며 귓속말로 어머니는 형과 제가 책임질 테니 아버지는 너무 걱정하지 마시라고 인사를 드렸고, 아버지는 그날 새벽 너무도 편안한 표정으로 하늘로 떠나셨다.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

이 죽음의 5단계는 비단 환자뿐 아니라 보호자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과정 같다. 환자의 병을 보호자도 똑같이 부정하며, 죽음에 대해 언급하는 의사와 방문객에게 분노를 표시하고 심지어 낫지 않는 환자에게 화를 내기도 한다. 하지만 극진히 간호하면 언젠가 나을 것이라 믿고, 시간이 지날수록 우울해지지만, 결국엔 다가오는 죽음을 수용하게 된다.

나중에 퀴블러로스 박사의 책을 읽으며 얼마나 후회하며 울었는지 모른다. 아, 그때 아버지는 암 선고를 받고 분노하고 계셨구나. 그때 아버지의 분노를 이해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왜 아버지와 멀어지기만 했을까. 그때 집에서 혼자 멍하니 소파에 앉아 우울해하시던 아버지를 위로해줄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어느 날 모든 걸 수용하고 유언을 남기시려 하시던 아버지에게 왜 나는 화를 내며 약해지지 말라고 소리쳤을까. 그때부터 아버지는 입을 다무셨고. 결국, 미안하다는 말밖에 못 남기고 가셨는데.

환자는 의사에게 무엇을 바랄까. 의사는 환자에게 어떤 존재일까. 나는 환자에게 어떤 존재여야 할까. 환자를 살려야 하는 의사는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면 안 되는 걸까. 더 이상 고칠 수 없는 환자에게 의사는 무엇을 도와줄 수 있을까. 환자를 고칠 수 없다면 과감히 포기할 줄 아는 것도 진정한 의사의 덕목에 포함될까. 역전이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의사는 가능하면 환자에게 감정이입 해서는 안 되는 것일까. 아직은 뭐가 맞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이번 주 병원에서 면담한 환자는 쓰러져서 병원에 실려 왔을 때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런 병에 걸렸나 생각하며 우울했다고 했다. 이런 환자에게 당신이 무언가를 잘못해서 병에 걸린 것이 아니라고. 병은 누구나 걸릴 수 있다고. 나쁜 사람 좋은 사람 골라서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고 말해주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죽음을 맞는 환자가 과연 행복해질 수 있을까. 행복한 죽음이라는 것이 가능이나 할까. 나는 가능하다면 환자가 죽음의 단계를 좀 더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의사이고 싶다. 만약 이것이 의사의 역할에 포함된다면, 환자뿐 아니라 그의 가족, 즉 보호자가 환자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데에도 의사가 해야할 중요한 역할이 있다고 생각한다.

죽음에 대한 정신적 두려움보다도 당장의 육체적 고통이 더 괴로운 환자가 있을 수 있다. 이럴 때 비록 병을 고치진 못해도, 육체의 고통이라도 줄여주면 이것이 환자에겐 큰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병의 치료를 넘어서서 환자 삶의 질을 총체적으로 고려하는 것이 의사의 역할이라면, 환자의 통증을 조절하는데 좀 더 세심하게 신경 쓰는 의사이고 싶다.

삶의 마무리를 평화롭고 아름답게 하는 것이 떠나는 이는 물론, 그를 떠나보내는 모든 이에게까지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른다. 너무도 가슴 아프지만, 피할 수 없다면, 나는 환자가 행복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의사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