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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아래

의사 선생님, 섭섭혀 섭섭혀...

어제 오전 한 아버님이 진료실로 들어왔다.

"저희 어머니가 보건지소까지 오기 힘드시다며 저를 보내셨어요."

차트를 보니 

혈압약을 드시는 92세 할머니.


"어머니가 어디 아프셔서 못오셨어요?"

"그런 건 아니고 이제 나이가 드시니 오기 힘들다고 하시네요. 제가 가도 선생님이 약 주실 거라고 하셨어요."

"혹시 혈압은 재오셨어요?"

"아니요. 집에 혈압계가 없어요."

"혈압약을 받으시려면 최소한 혈압은 재셔야 하는데... 그리고 어머님이 정 오시기 힘들다고 하시면 보호자분이 이렇게 오실 게 아니라 저희 보건소 직원이 환자분 집에 직접 방문해서 혈압도 재드리고 약도 드리는 방문간호사업이 있으니 그걸 신청해보시는 게 좋겠어요. 대리처방은 장애 등급 같은 사유가 없으면 불법이거든요. 합법적인 방문간호를 신청해보시는 게 좋겠어요."

"아. 그런 게 있어요? 알겠어요."

"네. 직원분한테 잘 말씀드릴테니 가서 신청해보세요."


방문건강관리사업이란 

기초생활보장수급자, 저소득계층 다문화가족, 북한이탈주민, 독거노인, 지역아동센터(빈곤아동), 미인가시설, 보건소 내 타부서 및 지역사회기관으로부터 건강문제가 있어 의뢰된 자 등 그 밖에 방문이 필요한 건강문제를 가진 취약계층 등에게 

보건소 직원이 직접 주기적으로 가정에 방문하여 건강관리를 해주는 시스템이다. 


이렇게 하여 직원분에게 안내를 부탁드렸다.


근데 오후에 지팡이를 짚은 어느 할머니가 


"아이고~~선생님~~~섭섭혀~~~섭섭혀~~~~~아이고~~~~~~~~~선생님~~~너무하셔~~~~너무하셔~~~~"


이러시면서 진료실로 걸어 들어오셨다.


"아니, 어머님~~왜 그러세요? 무슨 일 있으세요?"

"아니, 내가 오기 힘들어서~~~아들을 보냈는데~~~선생님이 약 주실거라고~~~근데~~~아이고~~~선생님이 그냥 돌려보냈다고~~~~내가 직접 와야한다 그랬다면서~~~~~아이고~~~~선생님 해도해도 너무하셔~~~~섭섭혀~~~정말 섭섭혀~~~~"

"아니, 저는 직원분이 어머님 집에 직접 방문해서 협압도 재드리고 약도 전해드리는 서비스를 신청하시라고 한건데......"

"아이고~~~섭섭혀~~~~섭섭혀~~~"

(나중에 물어보니 어머님은 기초생활수급자가 아니어서 안된다고 직원이 했다고 한다. 그래도 의사가 의뢰한 건데 그냥 해주면 안됐을까. 방문간호란 것이 집에 돈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환자의 건강 상태에 따라 필요한 것일텐데...)


일단 어머님을 진정시키고,

맥박을 짚어 보았다.

측정한 혈압은 안정적이지만 부정맥이 있어서 걱정이 좀 되었다.


"어머님 평소에 가슴 아픈 건 없으세요?"

"아픈 거 까진 아닌데 평소에 여기 명치쪽이 가끔 막 두근거리고 가끔 숨도 가끔 텁텁 막히고...이제 나이가 들어서 그렇겠지"

"가슴이 좀 불편하세요?"

"응. 근데 아픈 건 아니야."

"언제부터 그러신데요?"

"언젠가부터 그래."

"어머님, 제가 오늘 혈압약은 드릴텐데. 진료의뢰서도 같이 써드릴테니 아드님이랑 같이 병원가서 검사 한번만 해보세요."

"안돼. 병원 안갈거야. 안가도 괜찮아. 이제 죽으면 죽는거지 뭐. 살만큼 살았는데."

"왜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깐 검사 한번만 받아보세요. 어머님 맥이 좀 좋지 않아서 그래요."


갑자기 할머니 눈가가 빨개지신다...


"...내가 선생님한테 이런 얘기까진 안할려고 했는데......내가 이렇게까지 나이 먹고...내 몸 아프다고...자식들한테 병원가자고...더이상 얘기할 수가 없어......"


"......"


"......"


"어머님......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는데요......

어머님이 건강하셔야 자식분들이 더 편하세요...어머님이 건강하지 않으시면 나중에 자식분들이 더 고생하지 않겠어요?......지금이라도 크게 아프지 않을 때 병원 한번 가보시는게 자식분들 위해서도 더 낫지 않겠어요? 이번 한번만 병원 가서 검사 해보세요."


"......고마워."


티슈를 계속 드려도 내 손 잡고 할머니는 울음을 그치질 않으신다...


할머니를 보내고 한동안 진료실에 멍하니 앉아있는데

섭섭혀. 섭섭혀 하시며 진료실로 들어오시던 할머니 모습이 눈에서 잊혀지질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