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없는의사회에서 일하는 저자가 자신이 겪은 일을 에피소드 형식으로 쓴 책.

평소 정치, 국가, 종교에 구애받지 않고 환자만 생각한다는 국경없는 의사회의 단순한 원칙이 멋있어 보이고 절대적으로 느껴지기도 했었다. 이런 점 때문에 의대를 지망하는 학생들 자기소개서에 국경없는의사회라는 단어가 그렇게 끊이지 않고 들어가는 것이겠지.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나니 내가 작년 보건지소에서 진료하며 겪은 일과 오버랩되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p. 82

하지만 이 병원이 이 근방에서는 유일한 정부병원이었다. 돈이 있는 사람이라면 사설병원을 이용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이 병원 외에는 달리 대안이 없었을 것이다.

(......)

그러던 병원을 국경없는의사회가 넘겨받았고 지금은 제법 병원 같은 모습을 갖추었다.

(......)

"지역 주민들이 좋아했겠는데."

"여론조사를 한 것은 아니니 지역 주민들이 좋아했는지 어쩐지는 알 길이 없지만 지역 사설 병원들과 약국들이 결사반대를 했다고 들었어."

"뭐 상상하기 어렵지 않은 반응이네. 서양의사들이 공짜로 치료해주고 약까지 주니 경쟁이 될 리 없지."

(......)

"우리가 떠나면 남아 있는 것은 결국 여기 병원과 약국인데 우리 때문에 모조리 문을 닫으면 지역 주민들은 그나마 형편없는 치료도 받을 길이 없는 거라고."


p. 94

도움이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 착한 놈, 나쁜 놈 가리지 않고 의료지원을 하는 것이 국경없는의사회가 그렇게 강조하는 중립성 아니던가.

"중립성이라고? 웃기고 있네."

중립성이라는 말만 나오면 루드빅은 늘 불만을 표시했다.

"아무 편도 안 드는 게 중립이냐? 할 말도 못하는 바보지."


p. 208

"우리에게 캠프 임대료를 받고 난민에게는 사용료를 받다니 아주 미쳐 돌아가는구먼."

베르나르가 책상을 치며 일어섰다.

"지난번에 내가 왜 쓰지도 못하는 땅에 캠프를 설치하는데 임대료가 비싸냐고 물었더니 뭐라고 했는지 알아? 미국에서 공부하는 자기 아이 학비를 벌어야 해서 그렇대."


p. 223

"정문에 있는 놈, 하역장에서 서류 검사하는 놈, 구호물자 검수하는 놈, 그리고 그놈들 상사, 이놈저놈 다 달라붙어서 190달러를 뜯어갔어."

"돈이 줄줄 세는군."

(......)

"우리는 긴급구호단체들이 장사할 속셈으로 떠들어댄 과대광고를 점검도 하지 않고 덩달아 따라 들어와 있는 거야. 이제는 소말리아라는 상징성 때문에 떠나지도 못하고 있는 거라고. 우리가 프로젝트를 접으면 기부자들이 뭐라고 하겠어?"

부르네타는 넘어가지 않았다.

"그게 1,000만 명이든 2만 6,000명이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고 우리는 그들을 돕잖아"

(......)

"다른 곳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많아. 우리가 여기에 이렇게 많은 돈을 퍼부어가며 있어서는 안 된다고. 특히 수시로 손을 벌리는 정부 관료나 난민에게 캠프 이용료를 받는 작자들, 전기요금으로 2,000달러를 내라는 놈들은 도울 필요도 없다고."


보건소와 민간 병원이 경쟁하는 현실이 잘못돼도 뭔가 한참 잘못됐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우리나라 노인 빈곤율이 50%가 넘는다는데 이렇게 무료로 약 나눠주는 것이 필요하지 싶다가도, 그럴거면 시예산을 민간병원에도 동일하게 지원해서 집근처 병원에서도 무료로 약을 주게 하지, 왜 보건지소에서만 무료로 약을 줄 수 있게 해서 어르신들이 집 앞의 병원 놨두고 2시간 넘게 멀리있는 보건지소까지 오시게 하나 싶기도 했다. 결국 농촌 병의원들이 경영난으로 문을 닫으면 정작 어르신들한테 혜택 주려고 만든 제도가 어르신들만 더 불편하게 만드는 악순환이 되겠구나 싶기도 했다. 이러니 농촌에서 의원 개설하면 수액주사나 물리치료 밖에는 못하나보다 싶기도 했고. 내가 이러한 악순환의 구조에 일조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2시간 넘게 버스타고 오는 어르신들 생각하면 안쓰럽다가도 한편으론 주소만 이 쪽이고 서울에서 외제차 타고 와서는 무료로 약 타가는 어르신들 보면 내가 여기서 뭐하는 짓인가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환자는 오지도 않고 보호자가 대리처방을 요구하다가 내가 거절하면 시청, 보건소 직원들 온갖 지역 인맥을 동원해서 압박하는 모습은 참 가관이다 싶었다.

사실 어르신들 집 근처에도 보건진료소라고 있고 거기서도 비록 의사는 없지만 보건소 직원이 거주하며 무료로 약을 나눠주는데 왜 멀리 이곳까지 오셨냐고 물어봤더니 진료소 직원이 말도 안되는 이유로 환자를 보건지소로 넘기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화가 나기도 했다. 예를 들면 혈압약 중에서 amlodipine, losartan만 딱 두가지만 가져다 놓고 nifedipine, telmisartan, valsartan 등 다른 성분의 혈압약 드시는 대부분의 환자들에게 (사실은 자기가 약 주문을 안했을 뿐이면서) 진료소에서는 줄 수 없는 약이라는 핑계로 모두 보건지소 의사에게 보내버리는 식이다. 이게 한 보건진료소만의 문제가 아니라 수많은 보건진료소에서 이런 식으로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의 기분이란. 결국 거의 모든 환자를 보건지소 의사에게 보내면서 진료소에서도 혈압약 주고 있다는 생색을 내기 위해 몇가지 정도 약만 갖다 놓고 진료소를 유지하고 월급을 받는 것. 그리고 보건진료소는 어떤 상황에서도 한달치 이상 약을 안주므로 여러 달치 약타고 싶으면 보건지소 가야한다고 보내면서 정작 보건지소 의사가 환자의 건강상 이유로 단기간 처방하면 그냥 전에 주던대로 세달치 똑같이 주지 왜 괜한 민원 발생시켰냐며 핀잔주는 것까지. 하지만 이러한 보건진료소들은 무의촌이 없어야 한다는 가면을 쓰고 앞으로도 계속 유지될 거라는 사실까지.

학생 때는 무상진료가 좋을 거 같다고 생각했는데 약을 분실하고 오셔서는 다시 무료로 분실한 약을 달라고 요구하시는 분이 하루에 한명은 꼭 발생하는 놀라운 현실을 보면서, 의학적으로 어르신에게 전혀 필요없는 약인데도 계속 달라고 요구하시는 어르신들을 보면서 과연 적은 돈이라도 지불하셨다면 불필요한 약을 계속 요구하거나 약을 쉽게 분실하셨을까 싶기도 했다.

국민의 건강은 당연히 국가에서 책임져야 하니 의료기관도 나라에서 전부 운영해야 하는 건가 싶었는데 정작 나라에서 운영하는 보건소, 보건지소에서 근무해보니. 환자의 건강을 걱정하기 보다는 민원과 예산에 더 전전긍긍한다는 걸 깨닫기도 했다. 예산 없으니 환자에게 정작 필요한 약인데도 조금만 주라고 한다거나 가능하면 싼 싸구려 약으로 쓰라고 압박하다가도 정작 의학적으로 필요없는 치료인데도 시장, 군수 등과 인맥이 있는 사람이거나 악성민원을 넣어서 괴롭히는 환자가 있으면 불필요한 비급여 진료라도 해주라며 무작정 지시하는 모습을 보면서 의료인이 아닌 사람이 의학적 근거없이 의료기관을 좌지우지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의료가 변질될 수 있는지 온몸으로 느꼈다.

한편으론 공공의료가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다가도 한편으론 그 점을 이용해서 자기의 사익만을 챙기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되고. 자신의 사익을 공공의 이익으로 교묘히 위장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이런 와중에서도 나름의 의미를 찾아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깨닫기도 했다.


국경없는의사회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그럴 것이다. 자신의 일이 선(善)이라고 생각하며 뛰어들었지만 다른 면에서 보면 악(惡)이 되기도 하는 현실에서 자신들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부당하게 반사이익을 얻는 집단이 생기고 자신들의 행동이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에 일조하는 듯한 모습에서 고민하며 괴로워하는 모습이 이 책에 솔직하게 쓰여져있다. 인류애라는 기치 아래 앞뒤 가리지 않고 단순하게 뛰어들어 일하는 모습이 한편으론 부럽기도 한편으론 감명을 받기도 하다가도 과연 저렇게 주변 상황과 이해관계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한가지만 단순히 바라보며 일하는 것이 과연 자기 만족 외에 무엇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2016. 6.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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